2009년 5월 2일
서울에서 출발해서 막히는 고속도로를 지나 서천에 도착했습니다.
한산모시관으로 향하던 중에 보리밭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리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에 벼를 수확한 후에 씨를 뿌려 재배하는 그루갈이의 대표적인 작물입니다.
또한 과거부터 식량작물의 하나로 기러져 왔고,
최근에는 수입산 옥수수를 대체할 가축 사료로 재배 목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보리가 아직 누렇게 여물지 않았는데도 수확을 하는 것을 보아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한산모시로 돌아와서 서천은 옛부터 모시가 유명했습니다.
한산모시의 한산은 서천군의 면입니다.
모시는 삼베와 함께 우리나라의 여름을 상징하는 전통 의복의 재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재배가 가능한 삼베와 달리
모시는 비교적 온난한 겨울과 높은 습도를 필요로 해서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와 가공이 가능했고,
또 삼베보다 실의 굵기가 얇으면서도 인장력이 높아 고급 옷감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느 전통 제조업과 마찮가지로 현재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거에는 서천을 비롯한 충청남도의 남부지역과 전라도에서도 모시가 많이 재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섬유가 등장하면서 모시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업을 수공업에 의존하고 있는 모시는 생산성에서도 뒤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모시풀의 재배 또한 줄어들게 되고,
주로 재배지 역할을 하던 전라도에서는 모시를 보기가 힘들어 졌고,
그나마 재배보다 모시를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서천에서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서천군에서 적자를 감수하며 한산모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산모시관의 작은 텃밭에 자라고 있는 모시풀입니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가장 크게 자란 것이 50~60cm 정도 였습니다.
다자란 모시풀은 여러 과정을 거쳐 실로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사람이 직접 하기 때문에 많은 공이 들어갑니다.
그중 모시풀을 실로 만드는 작업은 사람이 이로 직접 쪼개기 것이라 상당한 수고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모시는 습기를 머금었을때 가장 강하기 때문에 베틀 옆에 항상 가습기를 켜놓고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가습기가 없던 시절에는 창문도 없는 방을 만들고, 바닥을 지하로 파서
반지하 정도 되는 깊이에 베틀을 놓고 겨우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또 아예 동굴에 베틀을 놓고 작업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습도가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수많은 노력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베틀 기술자분들이 서천에서 100여 명 정도 계시지만 젊은 사람이 없고,
가장 중요하 세모시 실을 만들 수 있는 분들은 앞으로 10년 후면 사라질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모시는 자치단체에서 지원을 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실제로 수작업에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익 때문에 젋은 층에서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아
무형문화재로 이어지는 것 외에는 기술을 가지신 분들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판매면에서도 1년 동안 서천에서 만들어진 모시가 모두 판매가 되지 안을 정도로 부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모시 중에 가장 품질이 높은 세모시를 짜기 위한 실이 부족한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세모시에 필요한 가는 실을 만들 수 있는 분들은 이미 70~80대 이상이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손에서 일을 놓으신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시가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일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대에 사용되기에는 만드는 방법이 너무 까다롭고, 관리도 힘드며, 수지가 맞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즉, 진화론적 관점에서 용·불용에 의해 사용되지 않으니 점차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없다는 의견입니다.
분명 모시가 우리의 생활에 맞았다면, 어떤 기술 개발을 해서라도 계속 이어졌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수 억원의 적자를 감수하며 이어갈 만큼의 가치와
불필요에 의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